○ 1월. 천신(薦新)하는 이외에는 천아(天鵝)를 별도로 진상하지 말게 할 것을 명하였다. ○ 명 나라에서 사제(賜祭)하고 시호(諡號)와 부의(賻儀)를 하사하였다. 사신 왕학(王鶴)이 도착함에, 상이 맞이하고 전송하는 때에 몸가짐 하나하나가 모두 예절에 맞았다. 사신들이 함께 칭찬하여 마지않으면서 동방의 복이라고 하였다. ○ 2월. 일변(日變)으로 인해 중외에 교서를 내려 구언(求言)하였다. ○ 경외의 관서(官署)에서 법에 맞지 않는 형장(刑杖)을 쓰지 못하게 할 것을 명하였는데, 원상(院相) 이언적(李彦迪)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 여러 도의 관찰사에게 하유하여, 가난하여 결혼할 수 없는 자 및 기한이 넘도록 장례를 치르지 못하는 자를 찾고 물어서 아뢰도록 하였다. ○ 3월. 좌찬성 이언적이 휴가를 청하여 부모를 뵈러 떠나면서 차자를 남겨 경계하는 말을 올렸는데, 학문을 강구할 것, 이치를 밝힐 것, 어진이를 친히 할 것, 아첨하는 자를 멀리할 것 등의 4가지 조목이었다. 상이 너그러운 내용의 비답을 내리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 하교하기를, "근래 유자(儒者)들이 전혀 학문에 힘쓰지 않고 성균관 관원도 자주 바뀌어 가르치는 것을 일삼지 않고 있다. 그런데도 해사가 전혀 규찰하지 않아 학교가 쇠퇴하기에 이르고 말았다. 지금부터 재능과 덕망을 구비한 사람을 택하여 성균관의 직임을 겸직하게 하고, 임기가 차면 승서하기를 승문원 판교나 봉상시 정의 예에 따라 하라. 그리하여 대사성에까지 올라 오래도록 그 직임을 맡는다면 반드시 인재를 만들어내는 효과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뜻을 대신과 의논하도록 하라. 외방의 훈도(訓導)도 가려 뽑아서 차임하도록 하라." 하였다. ○ 4월. 팔도(八道)의 묵은 포흠을 견감하도록 명하였다. 호조가 뒤폐단이 있게 될 것이라고 하며 어렵다는 뜻으로 재차 반복하여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민생의 괴로움이 지금 같은 적이 없었다. 내가 바야흐로 창고를 열어 살려주고자 하는 마당에 어찌 묵은 빚을 바치도록 독촉하겠는가." 하고, 듣지 않았다. ○ 예조에 하교하기를, "근래에 가르치고 인도하기를 제대로 하지 않아 풍속이 투박해지고 말았다. 불효(不孝)와 불목(不睦)에 대한 법은 본래부터 국전(國典)에 있었는데, 여염 사람들이 듣지 못하고 배우지 못한 탓으로 전혀 알지 못하여 망녕되이 옳지 않은 일을 함으로써 죄를 저촉하니, 실로 불쌍한 일이다. 인륜에 대한 옛날의 가르침에다 국가의 법을 참작해서 교목(敎目)을 만들어 중외에 널리 반포하여 외떨어진 시골이나 후미진 고을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모르는 자가 없게 하라. 만약 어기는 자가 있으면 엄히 문책하고 벌을 주어 사람들의 마음을 선량하게 하고 풍속을 바로잡도록 하라." 하였다. ○ 경외(京外) 학교의 절목(節目)을 반포하였다. 절목은 다음과 같다. 1. 문관 가운데 학문과 행실이 사표(師表)가 될 만한 사람 및 경학(經學)에 정통한 사람을 각별히 선발한 다음에, 사성 이하 전적 이상은 매 품마다 각각 1명을, 사학(四學)의 겸교수(兼敎授)는 각 1명을 선발에 든 사람으로 차하하여 가르치는 일을 전담시킨다. 인재를 양성한 효과가 두드러진 자는 서열을 건너뛰어 승진시켜 포상하고 장려함으로써 다른 사람을 권면한다. 2. 성균관에 머물며 공부하는 생원, 진사 및 기재 유생(寄齋儒生)과 사학 유생의 독서 일수는, 《대학》은 1개월, 《중용》은 2개월, 《논어》, 《맹자》는 각 4개월, 《시경》, 《서경》, 《춘추》는 각 6개월, 《주역》, 《예기》는 각 7개월로 기한을 정하고, 통독(通讀)하거나 나누어 가르치되 책을 읽기 시작한 때와 다 읽은 때를 각각 그 이름 아래에 기록한다. 매월 초순에 예조 및 성균관 당상이 한자리에 모여 고강(考講)하여 통(通), 약(略), 조(粗), 불(不)을 기록한 다음, 매 식년 초여름에 사서(四書)와 한 가지 경(經) 이상의 분수(分數)를 통틀어 계산해서 우등 5명을 직부회시한다. 기재 유생 및 사학 유생은 매달 초순에 중학(中學)에 모아놓고 예조 낭청, 성균관 장관, 사학 관원 각 1명 및 윤차관(輪次官)이 사서를 고강한 다음 분수를 통틀어 계산하여 우등 10명을 생원ㆍ진사시에 직부한다. 당시 성균관에 머물며 공부하는 자는 고강에 들도록 허락한다. 분수 안에 불(不)이 있는 자는 우등의 열에 두지 말고, 그 가운데 게을러서 졸업하지 못한 자와 고강에서 연달아 불을 받은 자는, 생원과 진사의 경우는 벌을 논하며, 기재 유생 및 사학 유생은 도기(到記)에서 이름을 삭제하고 3개월 동안 다시 붙여주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3. 향학(鄕學)을 권면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생원, 진사 가운데 나이와 덕을 갖추어 가르칠 만한 사람이 있으면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연초에 천거하여 보고하게 하고, 전조(銓曹)는 취재(取才)의 유무에 구애되지 말고 자리가 비는 대로 충당한다. 그 가운데 취임하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으면 살고 있는 고을의 수령이 돈독히 권면하여 취임하게 하고, 가르친 효과가 있으면 감사로 하여금 보고하여 상을 주게 하며, 혹은 잉임시켜 권면하거나 재능에 따라 서용함으로써 권면하는 뜻을 알게 한다. 교생(校生)은 나이 30이 되도록 한 가지 책도 통하지 못한 사람 이외에는 세공(歲貢)에 충당하지 말아 자중할 줄 알게 한다. 4. 동몽훈도(童蒙訓導)에 적합한 사람은 사족(士族)이건 서얼이건 논하지 말고 현재의 6원 이외에 4원을 가설한다. 사족 및 모든 백성의 자제 중에서 8, 9세부터 15, 16세가 되는 자들에게 먼저《소학》을 가르쳐서 구두를 분명히 알고 문리를 조금 깨우친 다음에 차례차례《대학》,《논어》,《맹자》,《중용》을 가르쳐서 관학(館學)으로 올라가게 한다. 예조는 매 분기에 고강(考講)하여 훈도의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알아내어 정9품과 종9품을 놓고 각각 1품씩 올리거나 내려 제수한다. 외방은 매 고을에 학장(學長)을 두고 고례(古例)에 따라 가르쳐 향교로 올리고, 감사가 순행할 때 학장중 부지런히 한 자를 조사하여 추천해서 적절히 논상하며, 권면했는지 하지 않았는지를 전최(殿最)에 반영한다. ○ 간의대(簡儀臺)의 규표(圭表)가 터졌으므로 관상감에 명하여 보수하게 하였다. 관상감이 아뢰기를, "사인(士人) 하세준(河世濬)은 기발한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두 대궐의 보루(報漏), 일영(日影) 등 기구와 천체를 관측하는 의상(儀象)을 모두 하세준이 수리해왔습니다. 지금 본 관상감에 붙여줄 만한 자리가 없으니, 우선 가습독(假習讀)에 차하하여 관대를 갖추고 일을 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그 말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 정부와 병조에 명하여 장수의 재목을 천거하게 하였다. 장언량(張彦良), 이광식(李光軾), 양윤의(梁允義), 장세호(張世豪)를 천거하였는데, 장언량은 초자(超資)하고, 이광식 이하는 전조(銓曹)로 하여금 차례로 승진시켜 쓰도록 하였다. ○ 청백리(淸白吏)로 행 호군 박수량(朴守良), 대사간 조사수(趙士秀), 공조좌랑 김순(金洵)이 선발되었는데, 모두 자급을 올려주도록 명하였다. ○ 함경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졌으므로 의원을 파견하여 약을 싸가지고 가서 구료하게 할 것을 명하였다. ○ 5월. 우박이 내리고 지진이 있었다. 상이 반찬 수를 줄이고, 삼공 및 의금부와 형조의 당상을 소견하고 감옥의 죄수들을 풀어주었다. ○ 7월. 상이 소대를 행하였다. 시강관 심통원(沈通源)이 아뢰기를, "홍문관에 소장된 서적 가운데《훈사(訓辭)》라는 책이 있는데, 세조가 예종에게 경계한 글이 담겨 있습니다. 이는 전하의 가법(家法)이니, 좌우에 두고 수시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 9월. 태묘(太廟) 3실(室)을 증축하였다. 예조 판서 윤개(尹漑), 참판 홍섬(洪暹) 등이 아뢰기를, "태실(太室)은 7칸이고 동서에 각각 협실(夾室)이 있는데, 태조가 1실, 태종이 2실, 세종이 3실, 세조가 4실, 덕종이 5실, 예종이 6실, 성종이 7실입니다. 성종을 부묘(祔廟)하던 때에 이미 태실을 증축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끝내 문종을 협실로 옮겼으므로 당시 논의하는 자들이 온당하지 않게 여겼습니다. 지금 중종을 새로 부묘해야 하는 데, 만약 인종을 또 부묘하자면 문종을 봉안할 태실까지 합쳐서 반드시 3칸을 증축해야만 태묘의 제도를 갖출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이에 태묘의 신주(神主)를 인정전으로 옮겨 봉안하였다가 증축을 마치고 나서 열성의 신주를 도로 봉안하였는데, 이때 문종의 신주를 제4실에 봉안하였다. 마침내 중국 조정에서 태묘를 개수한 후 천하에 사면령을 반포하는 예에 따라 도로 봉안하는 때의 집사관(執事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